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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사물의 기호학과 Kitsch: B급 감성이 하이엔드를 만났을 때

hyuckee 2026. 6. 15.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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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물들은 과연 디자이너가 처음 의도한 본래의 용도로만 사용되고 있을까?

실내 자전거가 어느 순간 옷걸이로 전락하고,
다 마신 머그잔이 연필꽂이로 사용되는 풍경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돌잡이 상에 오르는 실이나 판사봉, 청진기 역시 본래의 실용적 기능은 철저히 배제된 채 오직 상징적 의미로만 소비된다.
이처럼 사물은 고정된 객체로 머물지 않으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기호학적 접근이 필수적이다.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

스위스의 언어학자 Ferdinand de Saussure는 기호의 의미를 그릇인 '기표'와 내용인 '기의'의 결합으로 정의했다.
기호는 사회적 조건이나 문화적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낸다.

프랑스의 철학자 Roland Barthes는 이를 발전시켜 '신화 체계'를 주장했다.
기표와 기의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1차적 기호가 다시 새로운 기표가 되어 또 다른 의미를 얻게 되는 과정을 뜻한다.
이 과정에서 신화적 의미 작용이 발생하며, 이는 매우 자연스럽게 우리 일상 속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게 된다.

막대 과자 '빼빼로(1차 기호)'가 11월 11일이라는 특정 시기와 결합해
'사랑과 우정을 전하는 마음(2차 기호)'라는 새로운 문화적 의미,
즉 신화로 덧씌워지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광고와 기호

광고는 이러한 시대적 욕망과 기호를 가장 함축적이고 강력하게 보여주는 재현의 판타지다.
광고가 소구하고자 하는 바가 '기의'라면,
이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된 시각적 요소들은 '기표'가 된다.

재미있는 것은 시대에 따라 기호의 의미가 정반대로 뒤집히기도 한다는 것이다.
1925년 동아일보에 실린 모리나가 밀크 카라멜 광고는 '먹으면 살찌는 카라멜'이라는 문구를 내세웠는데,
당시 시대상 속에서 '살이 찐다'는 것은 부와 건강을 상징하는 매우 긍정적인 기호였다.

반면 1995년 한겨레신문에 실린 비누 광고는 "살 빠지는 비누"를 전면에 내세웠다.
동일한 육체적 변화를 두고도 시대의 욕망에 따라 기호의 의미가 정반대로 뒤집힌 것이다.

남성 화장품 광고 역시 1970년대에는 정장을 입은 남성의 야망과 성공을 시각적 기표로 삼았던 반면,
2002년 이후에는 안정환 등 이른바 '꽃미남' 모델을 내세우며 뷰티와 부드러움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호가 변모했다.

Kitsch와 High Art

키치는 본래 '값싸게 만들다'라는 뜻의 독일어 방언 'Verkitschen'에서 유래한 용어로,
미학에서는 저속한 작품이나 보기 괴상한 사물을 뜻했다.

진품적 가치를 흉내 내고 모방하는 통속적 사회 현상의 산물로 여겨졌으며,
예술사학자 Arnold Hauser는 키치를 향해
"달콤하고 싸구려 형식을 갖춘 사이비 예술이며, 위조되고 기만적인 현실 묘사에 불과하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급 예술의 권위를 조롱하며 대중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1960년대 팝아트의 등장 이후,
시각적으로 키치와 유사한 외형을 띤 형태들이 점차 디자인의 영역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키치는 단순히 저속한 모조품이 아니라, 일종의 삶의 태도이자 B급 감성을 즐기는 새로운 유희 코드로 자리잡았다.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 UV의 '이태원 프리덤', 영화 '극한직업'이나 넷플릭스 '닭강정', 아이브의 노래 Kitsch에 이르기까지,
키치적 감성은 대중문화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기와집 모양을 흉내 낸 플라스틱 개집이나, 알맹이 없이 테만 있는 안경처럼
과거를 우스꽝스럽게 복제하거나 실용성을 탈피한 사물들이 하나의 문화적 코드로 소비되는 것이다.

더욱 역설적인 것은 가장 보수적이고 고급스러움을 지향해야 할 하이엔드 명품 브랜드들이
이 '싸구려' 키치 감성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 Moschino는 패스트푸드점의 감자튀김 모양을 본뜬 스마트폰 케이스를 출시하고,
흔한 화장실 유리 세정제 모양의 병에 값비싼 오 드 뚜왈렛 향수를 담아 판매했다.

Gucci는 화려하고 맥락 없는 패턴들을 충돌시킨 키치적 스타일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Louis Vuitton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화를 가방에 노골적으로 프린트하여 진품과 모조품의 경계를 흩뜨렸다.


결국 현대 디자인에서 사물은 단순히 쓰임새를 지닌 도구가 아니다.

기호학적 관점에서 사물은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입고 벗는 텍스트이며,
키치 디자인은 고급과 저급의 경계를 허무는 강력한 문화적 기호로 작용하고 있다.

값싼 형태를 빌려 가장 비싼 가치를 창출하는 이 아이러니야말로,
취향이 다원화된 현대 소비 사회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디자인의 현주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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